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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소개

김문수라는 인물을 알아보기

개요

대한민국 노동운동가 출신 정치인.

1970년대부터 노동운동 민주화운동을 하며 청년 민주화운동의 지도자인 김근태와 함께 세간으로부터 인지도를 얻었으며, 특히 당시 노동운동에서 중요 인물로 평가받았다.

이후 정계에 투신하여 민중당에 참여하여 1992년 14대 총선에서 전국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후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여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에서 제15대, 16대, 17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제4, 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출마하여 32대, 33대 경기도지사를 연임했다. 대단히 성공적인 정치 이력을 쌓아왔고 경기도지사로서의 도정 지표도 뛰어나 차기 유력 대선 주자로 꼽혀왔으나 2011년 도지삽니다 갑질 사건으로 그동안 쌓아왔던 친서민적 이미지가 한순간에 무너지며 중진급 정치인으로서의 정치생명이 사실상 끝났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새누리당 경선에 출사표를 던졌으나, 박근혜에게 밀려서 후보가 되지 못했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대구광역시 수성구 갑에 출마했으나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후보에 밀려 낙선했으며,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서울특별시장 선거에 자유한국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더불어민주당 박원순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2022년 9월에는 윤석열 정부에서 장관급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됐고, 2024년 7월 고용노동부장관 후보자로 지명되었다.
 
 

1. 출생 및 성장

1951년 9월 27일(음력 8월 27일), 경상북도 영천군 임고면 황강동(현 영천시 임고면 황강리)에서 아버지 김승헌(金升憲, 1916. 7. 26 ~ 1977. 6. 23)과 어머니 창녕 조씨 조순조(曺順祚, 1919. 3. 22 ~ 1973. 12. 11)[1] 사이의 4남 3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영천국민학교, 경북중학교(現 경운중학교), 경북고등학교,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였다. 전공을 결정하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에 당시 영남대학교 경영학과에 재학 중이던 사촌형 김장수(金章洙, 1949. 8. 14 ~ )가 전공으로 경영학을 추천해서 경영학과를 선택하게 되었다고 한다.
 

2. 노동운동가로서 김문수

노동운동가 시절 김문수
 
동지로 지내던 시절의 김문수는 전설이었다. 운동권의 황태자이자 하늘 같은 선배였다.

 



본디 매우 유명한 운동권 지도자 출신이었다. 사실 유명한 정도가 아니라 무려 20년 이상을 노동운동에 투신하며 활동한, 그야말로 1980년대 노동운동을 대표하는 전설이다.

대다수가 김문수를 따르거나, 혹은 김문수가 이끌던 조직과 깊게 연계되어 활동하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당시 김문수는 노동운동계의 김근태 라고 볼 만큼 절대적인 인물이었고, 수많은 노동운동 후배들의 흠모와 존경을 받던 인물이다.

1학년 때 훗날 민주당의 국회의원이 되는 5년 선배 심재권의 권유로 서울대 학생운동 서클 중 하나였던 "후진국 사회연구회"에 들어가 학생운동을 시작했고, 2학년 때 김근태에 의해 공활을 경험하고 노동운동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김문수는 70년대 초중반까지는 학생민주화운동 노동운동을 병행했는데 스스로 회고하기를 당시 진로 방향을 제대로 못 잡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노동운동에만 전념하기로 하고 공장에 위장취업 후 노동조합을 만들면서 80년대에 전설적인 노동운동가가 되었다.

전태일의 모친 이소선 여사 역시 생전에 자신이 평소 아들로 대우하던 장기표와 함께 김문수 역시 "내 아들"이라 불렀다. 심지어 김문수가 자신의 적과 같은 한나라당의 소속 정치인이 된 지 한참 지난 시절에도 언론 인터뷰에서 "차라리 잘했다 생각했다. 그 나쁜 놈들한테 고개 한번 숙여서라도 문수도 이제 국회의원 한번이라도 해야지 싶다. 우리 기표도 그렇게라도 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김문수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훗날 한나라당 소속임에도 이소선 여사의 장례식을 지킨 사람 중 한 명도 김문수였다.

그의 얼굴 한번 못 본 신인급 노동운동가 청년들도 입소문으로 퍼진 '노동투쟁 신화 김문수'의 파란만장한 전설들을 들으며 존경했다고 하니 그 위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대학 제적 후 스스로 공장에 위장취업하여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을 지내면서 밑바닥부터 노동운동을 한 인물이다.

본격적으로 대학생들의 위장취업이 시작되는 시기가 1980년대다. 1980년대의 대학생들, 특히 노동운동계에 뛰어든 20대 젊은이들에게 김문수는 절대적인 전설이었다. 당시 김문수의 연설 내용을 그대로 적은 필본이 돌아다니곤 했다고 하는데, 그 연설을 못 본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필본을 돌려 보면서 눈물 흘리는 경우들도 흔히 있었다고 할 정도니... 상술된 김문수의 청년기에 대한 진보정치인들의 발언이 과장된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야말로 김문수는 1980년대 노동운동의 상징이었다.

1985년 서울노동운동연합의 설립에 기여했는데, 1986년 김문수가 인천 5.3 운동으로 체포되자, 그 뒤를 이은 인물이 심상정이었을 정도다! 심상정 결혼을 주선해 준 사람도 김문수였고 김문수가 고문을 받으면서도 심상정의 위치를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심지어 유시민 작가와 티비 토론을 하러 나와서 과거 서로를 동지로서 보호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하면서 덕담을 나누기도 했었다. 이 시절 안기부에서 고초를 겪은 이야기는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 최민희 의원의 연설 중에 짤막하게 언급되기도 했다.

그리고 6월 항쟁 이후로 양김의 분열로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자, 본격적인 진보정당이 필요하다면서 이재오, 장기표, 이우재 등과 손을 잡고 재야민주화운동 세력, 노동운동 세력 일부를 모아서 1990년에 민중당을 창당하고 본인은 공장 밀집지역인 서울 구로(갑) 지구당 위원장을 맡는다. 하지만 민중당은 1992년 14대 총선 때 단 한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하고 득표율 미달로 해산되면서 말 그대로 물을 먹었다. 그리고 같은 해 14대 대선에서 재야를 비롯한 비 김대중-김영삼 계열의 민주화운동 추진 진영에서 민중후보로 추대했던 무소속 백기완도 1%라는 저조한 득표율을 보이며 낙선했다.

백기완의 낙선과 함석헌의 죽음이 김문수의 민주화운동 포기 및 전향 선언과도 어느정도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이고 이 시점부터 진보진영의 인사들과도 척을 지며 본격적으로 김문수에게 가장 흔히 쓰이는 별명 중 하나인 변절자로 불리기 시작한다. 또한 이때 백기완과의 악연이 김문수가 민자당에 들어가는 계기로 지목되기도 한다.

이후로 1년간 택시기사로 일하다가 94년 김영삼에게 영입되어 민주자유당에 입당하면서 우익으로 전향한다. 이때 김영삼은 과거 군사정권 잔당이라는 색채를 지우기 위해서 재야민주화운동 인사들을 대거 영입했는데, 그 중에 가장 네임드가 김문수와 이재오였다. 그리고 이 둘을 따라서 엄청난 숫자의 노동운동가, 재야인사들이 민주자유당에 합류한다. 이후 국회의원 경기도지사도 지내면서 신한국당 - 한나라당 - 새누리당으로 이어지는 보수정당의 대표적인 대권 잠룡으로까지 성장하게 된다.

사실 김문수 입장에서는 1970년대까지 자신이 해왔던 학생운동의 경력이 끝나고, 1980년대에는 자신의 생각과 다른 방향이 학생운동의 주류가 되었으니 전향을 하는 것도 크게 이상할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197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 20년 이상 김문수는 현장중심의 사상을 가진 노동운동가였다.

하지만 당연히 전향에 따른 비판을 피할 수는 없었고 아직까지도 김문수는 진보 쪽 인사들에게 "노동운동을 배신한 변절자"라고 불리는 경우도 많다. 같이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김문수를 보호하기 위해 고문을 당했던 사람들도 많았다.그러나 당시 국민의힘의 전신인 신한국당 3당 합당 이후 민주자유당을 완전히 장악한 김영삼에 의해 독재정권 인물들이 죄다 쫓겨나가고 상도동계, PK 출신들과 개혁 공천으로 영입된 인사로 한 번 물갈이된 당이나 다름 없었다는 점은 김문수의 행보를 정당화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신한국당 자체는 독재정당의 역사를 공유하지만, 노태우와 민정계가 3당합당으로 끌어들인 김영삼에게 잡아먹혀 물갈이가 된 상태라는 점이다. 하지만 탄핵 정국 이후 뉴라이트 세력이 기득권을 잡기 시작하면서 속칭 상도동계, 소장파들은 대부분 전 군부세력으로 전향했고 일부 소장파들은 탈당해서 열린우리당으로 들어갔다.

어찌되었든, 김문수 이외에도 운동권 중에는 1990년대에 우익 전향자가 속출한 건 흔한 일이었다. 다만 그 운동권 출신 중에서도 김문수가 거물급이니 유명세를 탄 거다. 이런 온건파 출신 중엔 "87년 이전이면 모를까 민주화가 된 이후엔 이런 호전적인 운동권 마인드가 오히려 도움이 안될 수 있다"라고 보는 사람도 있으므로, 김문수와 연관된 여러 행보가 비판 사유가 될 순 있어도, 그가 운동권 성향을 떨쳐냈다는 이유가 비난 사유가 되기는 힘들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상술된 이소선 여사(전태일의 모친)는 이미 김문수가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도 진보언론과 인터뷰할때 한나라당 쪽을 "나쁜 놈들일지라도"라고 부르면서도 "김문수는 내 아들이다. 나는 문수가 어디 가든 원망한 적이 없다. 김문수도 국회의원은 했으니 다행이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심지어 이소선 장기표도 그렇게라도 해서 국회의원이 되었으면 좋겠다고까지 말했었다.

김문수가 비록 지금은 보수 성향의 새누리당 소속이라고 하지만 과거를 잘 살펴보면 민주화운동이자 야당 인사였던 김영삼이 운동권 출신 김문수를 끌어들여 자신의 당인 민주자유당 - 신한국당으로 영입시킨 것으로, 그 당이 현재 새누리당 - 자유한국당으로 존속하고 있는 것이니, 정치 입문 당시부터 우익적인 색채를 띠었다기보다는 시간이 흐르며 당의 방향에 따라 운동권 색을 버리게 된 모습이 강하다고 볼 수도 있다.

특히 김영삼이 당시 당으로 끌어들인 사람은 대다수가 야당 인사(상도동계)이거나 민주화에 협력하던 사람(손학규, 이재오, 노무현, 김문수 등)이었기에 그렇다. 하지만 이에 대해 보수정당으로 간 뒤에도 개혁파로 남아 보수정당의 각성을 추구하던 사람들과 달리, 극우적 발언도 서슴지 않으면서 우익층의 환심을 사려는 것을 볼 때 결국은 잿밥에 더 관심 있는 것 아니냐고 김문수를 비판하는 사람도 있긴 하다. #

 

 

3. 정치 입문 이후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국회의원 자유민주연합 박규식 후보, 김대중의 측근인 새정치국민회의 박지원 후보 등을 꺾고 당선되었다. 이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7대 총선 앞두고는 최병렬 당시 당대표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가결을 책임지고 사퇴해 치러진 전당대회에 당대표 경선에 출사표를 냈지만, 당선자인 박근혜, 2위를 기록한 홍사덕에게 밀린 3위를 기록하였고, 제17대 국회 개원 앞두고 원내대표 경선에 출마하였으나, 상도동계 서울 서초구 을 5선 중진인 김덕룡 의원에게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경기도지사 출마를 위하여 17대 국회의원직은 사퇴하였다.
 

민선 최초로 경기도지사를 연임할 만큼 상당히 좋은 능력과 정치 감각을 발휘하였다. 그가 창시한 개념인 GTX를 2018년 들어 오히려 더불어민주당이 밀어주는 것만 봐도 증명된다.

김문수의 도지사 도정 중 가장 큰 성과로 거론되는 것은 경기도 최초의 대중교통 환승할인이 적용된 수도권 통합 요금제 도입이다. 2004년 서울시 대중교통 체계 개편 이후 2년 넘게 지지부진하던 것을 2006년 7월 취임 후 곧바로 재협상에 나서서 수도권 통합 요금제가 마침내 1년 만인 2007년 7월 1일부터 시행되게 하였다.

김문수는 애초 대중교통 분야에 관심을 많이 가진 인물로 알려져 있었는데, 일각에선 예전부터 그가 철덕이라는 설이 나돌기도 했다. 또한 택시 면허를 보유하여 젊은 시절 택시 기사로 일했던 경력을 살려 정치인이 된 후에도 전국 각지에서 택시 기사 체험을 하고 다니며 택시를 대중교통으로 인정하고자 하는, 속칭 택시법을 찬성하는 견해를 보이기도 했다. 과거 PD파, 즉 노동운동권에 있으며 이런 대중교통에 관심을 가졌고 연장선상으로 택시 기사 체험이란 파격을 선보인 것이란 추측이 많다. 후술되어 있듯 대중교통만큼은 주민과 매우 가까운 행보를 보인 것. 정치인이 택시기사로 민심을 청취하는 것도 김문수가 최초다.

경기남부와 북부지역을 연결하는 경기순환버스도 김문수 도지사의 업적이다. 경기순환버스 운영의 활성화를 위해 2013년 4월 1일 수원시와 의정부시를 최단거리로 빠르게 통행하는 경기순환 8401번 노선을 시행하게 되었다.

2018년 범 수도권 부동산 시장을 뜨겁게 달궈온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 역시 최초 기획자가 김문수였다. 아이러니한 건, 최초 제안자는 김문수인데 2018년 들어서 GTX를 적극 추진하는 쪽은 이재명 경기도지사, 심상정 정의당 의원 등 진보 성향 정치인들이라는 것이다.

2012년 18대 대선 경선에서 8.7%를 득표하여 승자인 박근혜와 큰 차이나는 2위를 기록했다. 나머지 하위권 3~5위 후보의 득표를 합한 것보다 많은 득표였으나 박근혜의 득표는 거의 10배에 해당하는 84%(...) 반영비율 20%인 여론조사에서 75:16으로 조금 더 따라 붙은 것이 위안거리였다.

임기 말인 2013년에는 일본 기후현과 관광, 도자기 분야, 저출산 고령화 대책 등에 대해 교류 협력했다. 김 지사는 “일본 한국보다 먼저 저출산·고령화 현상이 고착화했다. 한국도 과거 일본처럼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부동산 침체와 경제적 위기를 겪고 있다”며 “일본의 앞선 경험이 한국에 도움이 될 것이므로 이에 대한 해결방안에 대해 교류 협력했으면 한다”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후루타 하지메 지사는 공감을 표하며 “기후현에서는 5년 전부터 인구감소 저출산·고령화 대책이라는 10개년 장기구상을 세웠다”며 공감을 표했다. # 조금 더 일찍 시작했다면 새로운 화두가 되었을 것이나 다소 만시지탄.